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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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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본당

영유본당 永柔本堂

1902년 평남 평원군 영유읍 이화리(平南 平原郡 永柔邑 梨花里)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파트리시오. 영유지역은 1895년 영세 입교한 이 고장 출신의 한학자(漢學者) 조상순(趙象淳, 노르베르토)에 의해 전교된 후, 1897년 섶가지[薪枝里]본당 관할 공소로 개설되었고, 이어 1902년 군청소재지인 영유가 전교요충지로 선정되어 섶가지본당이 폐쇄되고 그 후신으로 창설되었다. 초대 주임신부로 섶가지본당 주임이던 망(Meng, 明) 신부가 부임, 교세신장에 주력하는 한편 1908년 영청(永淸)학교를 개설했고 1911년 보댕(Bodin, 邊) 신부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1916년까지 사목하였다. 그 후 1919년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여 각종 신심단체를 조직했고 1923년 메리놀회가 진출하여 1924년부터 메리놀회 신부들이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기 시작하면서 교세가 급격히 신장, 본당 내에 시약소, 양로원, 고아원, 기술하교 등이 개설되었다. 또한 1925년 이 지역 최초의 고딕식 연와조성당이 건축되고 이듬해 메리놀수녀회 한국지부가 본당 내에 설치되어 동(同)회의 수녀들이 본당사무 일부와 부속사업을 전담하게 되었고, 1926년 순천 · 마산본당, 1930년 안주본당, 1931년 숙천본당 등을 분할 독립시켰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회 성직자들이 일경(日警)에게 체포 구금되자 영유본당은 한 때 마산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었으나 평양교구가 방인교구로 재정비되어 1942년 10월부터 신부들이 부임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재출발하게 되었고, 1945년 2월에는 메리놀수녀회의 사업을 계승하여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영유분원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북한공산정권의 교회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12월 10일 주임신부이던 홍도근(洪道根, 요한) 신부가 체포되고, 이어 1950년 6월 25일 성당을 비롯한 사제관 · 양로원 · 수녀원 등 모든 부속건물이 몰수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본당 내의 신심단체로는 가톨릭청년회, 명도회, 안나회, 가톨릭소년단, 예수성심연맹, 가톨릭운동연맹지회 및 분회, 소화데레사회, 성모회 등이 있었고, 부속사업체로는 영청학교, 1927년 개설된 여자기예학교(女子技藝學校), 1926년 개설된 시약소와 고아원, 1931년 개설된 양로원 등이 있었으며, 관할공소로는 평남 평원군과 대동군(大同郡) 일대의 송림(松林), 추흥(楸興), 금학(金鶴), 남양(南陽) 등이 있었다. 그리고 1937년의 교세는 신부 2명, 수녀 4명, 총교우수 1,500명, 공소수 12개소, 주일학교 10개소 등이었다.

◆ 섶가지본당 ◆
1898년 평남 평원군 검사면 신지리(平南 平原郡 檢山面 薪枝里)에 창설되어1902년 폐쇄된 본당. 섶가지 일대는 1864년 평남 은산(殷山)의 적뢰동에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성세성사를 받고 귀향한 강용홍(康龍洪, 베드로), 김덕삼(金德三, 요셉), 김의경(金義慶, 안토니오)등에 의해 처음으로 전교 되었고, 병인(丙寅)박해로 교우들이 산산이 흩어졌다가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다시 교우들이 모이게 되었다. 1895년 평양 본당 창설에 이어 1898년 본당으로 창설되었고 초대 주임에 파리 외방선교회의 샤플랭(Chapelain) 신부가 부임하여, 평양이북지역을 순회 전교하며 의주(義州), 순천(順川), 영유(永柔), 안주(安州) 등지에 공소를 개설하였다. 1901년 2대 주임신부로 망(Meng, 明) 신부가 부임했으나 이듬해 망신부가 전교상 유리한 지역인 영유로 본당을 옮기면서 본당은 영유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발전을 계속하여 1908년 공소에 성숙학교(聖肅學敎)를 개설하는 한편 1913년 강당을 신축하고 로마에서 종(鐘)을 구입해서 신축 강당의 종탑에 달았다. 그 후 1931년 숙천본당(肅川本堂)이 창설되자 영유본당으로부터 숙천본당 관할로 이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