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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본당

평신도 13   성직자 0   수도자 3  

신천본당 信川本堂

소재지는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 사직리(黃海道 信川郡 信川邑 社稷里). 신천읍에서 50여리 떨어진 산골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斗羅面 淸溪洞)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방문하여 공소를 열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행한 것은 1864년이었고, 청계동본당이 개설된 것은 1898년이었다. 이 때 신천읍에도 청계동 본당 관할 하에 들어갔다. 1900년 신천읍의 신자수는 60여명을 헤아렸다. 1912년 청계동본당이 폐지됨에 따라 신천읍 공고는 1921년부터 재령(載寧)본당 관할 하에 들어갔다. 1930년 신천면 척서리(信川面 滌署里)에 성당이 세워지고 재령본당의 신성우(申聖雨, 마르코) 신부가 초대 본당사제로 부임함으로써 신천본당은 발족되었다. 신 신부는 1931년 해주(海州)본당으로 전임되고, 강원도 약사리(藥司里)본당에서 전교하던 이기준(李起俊, 토마스) 신부가 2대 사제로 부임하였다. 황해선(黃海線) 철도의 개통과 함께 인구 급증으로 1933년 읍내 신자수가 400여명이나 되었다. 1935년에 부임한 3대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신부는 본당을 사직동으로 이전, 1936년에는 미화(薇花)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37년 4대 신인식(申仁植, 바오로) 신부가 부임, 1938년 동성(東星)신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고, 5대 박원영(朴垣英, 프란치스코) 신부는 1941년 충남 당진(唐津)본당 사제로 전임되었다. 그 후임으로 곡산(谷山)본당 사제로 있던 구천우(具天祐, 요셉) 신부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태평양 전쟁이 발발, 가중되는 일제 탄압 하에 어렵게 성당을 운영해 나갔다. 8.15후 북한 당국에서 유치원 건물을 접수하려는 속셈을 눈치 챈 구 신부는 1946년 유치원을 자진 폐원, 그 건물을 성당으로 개축함으로써 접수당하는 것을 모면하였다.

1949년 2월 구 신부는 어느 학생에게 월남을 알선해 준 일과 성당의 등사기로 반공비라를 제작 살포한 일 등의 혐의로 신천 내무서에 연행되어 신문을 받게 되었다. 신문 중 용변을 보러갈 허락을 얻은 구 신부는 내무서 벽의 뚫어진 틈으로 기어 나와 탈출하는데 성공, 1주일 후 취야(翠野) 공소에서 해주본당의 한윤승(韓允勝, 필립보) 신부의 도움을 얻어 옹진(甕津)으로 월남,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 서울에 도착하였다. 구 신부는 1950년 11월 유엔군 북진으로 자유를 찾은 신천으로 가서 신자들과 읍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감격어린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유엔군의 후퇴 때 구 신부가 다시 월남함에 따라 신천본당은 목자 없는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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