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북녘본당 소개 > 서울대교구(북녘지역) > 송림본당

송림본당

평신도 28   성직자 0   수도자 3  
송림본당

송림본당 松林本堂

소재지는 황해도 송림시 산서리(黃海道 松林市 山西里). 1902년 황주(黃州)본당이 설정되면서 송림에 공소가 개설되어 황주본당의 초대 신부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신부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 이듬해 송림의 교세는 영세신자 26명, 예비신자 20명이었다. 1904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이곳에 포구(浦口)를 열고 겸이포(兼二浦)라 칭했으며, 그 해에 노일전쟁(露日戰爭)이 일어나자 부산(釜山)을 거쳐 육로로 압록강(鴨綠江)을 향해 북상하는 일본군의 군수물자 양륙항(揚陸港)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군 병참부대와 한국인 노무자들이 많이 상주(常駐)하게 되었는데, 그 노무자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도 있었을 것이다. 1915년 황주본당이 폐지되고, 1916년 사리원(沙里院)본당이 창설되자, 송림지방은 사리원 공소의 관할이 되었다. 1919년말 신자수는 100명을 넘게 되어 비로소 공소 강당을 마련하고, 주일학교도 개설하였다.

1939년 7월 송림지방은 오랜 공소시대를 청산하고 서울 교구장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에 의해 본당으로 승격, 초대 본당주임으로 강원도 양양(襄陽)본당을 맡고 있던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신부를 맞게 되었다. 당시의 관할공소는, 황주원동(龜洛面 仁訓里 院洞), 던모루, 능리, 적은동(三田面 外松里 積銀洞), 포북리(靑童面 浦北里), 금광리(靑水面 金光里), 황토개(黑橋面 永深里 黃土峴), 청수면(淸水面), 빙량리(黑橋面 氷梁里) 등 10개소였다. 유재옥 신부의 부임 직후인 그 해 8월에 산서리(山西里)에 확보해 둔 1만여 평의 부지에 성당, 사제관, 식청을 새로 짓는 큰 역사가 시작되었다. 착공 1년만에 건평 83평의 벽돌성당과 21평의 사제관, 19평의 식청이 완공되었으며, 총공사비 2만 6,000여원을 서울교구장 라리보 주교와 황해도 감목대리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의 지원 외에 본당과 공소의 모든 교우들이 가구별로 낸 성금으로 충당되었다. 준공 축성식은 1940년 12월 성 프란치스코 축일에 라리보 주교 집전으로 성대히 거행되고, 본당 주보는 ‘예수 성심’으로 명명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眞珠灣)을 기습하여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던 날, 유재옥 신부는 겸이포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유는 평양교구(平壤敎區)의 메리놀 외방선교회 미국인 신부들과 연락해서 군수공장으로 지정된 겸이포 제철소의 기밀을 탐지하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유 신부는 이듬해 4월 18일 138일만에 무죄 석방되었다. 8.15광복 후 북한 당국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더니, 1950년 6월 24일, 유 신부는 정치보위부에 납치, 수감되었다가 1주일 후 해주(海州)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 해 10월 4일 유 신부는 수감자들과 함께 동해주 해변으로 끌려가 자신들이 생매장 당할 구덩이를 팠고, 이튿날 새벽에 그 구덩이에 생매장되어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