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북녘본당 소개 > 서울대교구(북녘지역) > 사리원본당

사리원본당

평신도 35   성직자 0   수도자 3  

사리원본당 沙里院本堂

이 본당의 전신인 봉산검수(鳳山劍水) 본당이 재령(載寧) 본당에서 분리 독립한 것은 1900년이었는데 초대 신부로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가 부임했으며, 1905년부터 6년간은 손성재(孫聖載, 야고보) 신부, 1911년 샤보(Julius Chabot, 車麗松) 신부, 1913년부터 이기준(李起俊, 토마스) 신부가 2년간 전교한 후 서흥(瑞興) 본당에서 또 1년간 전교하고, 1916년 마침내 사리원 본당신부로 부임, 이 본당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이기준 신부는 사리원의 그 전의 공소는 물론 황주 · 서흥 · 봉산군 외에 평안도 중화지방과 황해도 신계지방 일부까지도 포함한 총 35개 공소의 1,500여명 신자를 관할하였다. 1936년 서울교구 황해도 감목대리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가 4대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 감목대리구도 사리원 본당으로 옮겨왔다.

1934년 서울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4명의 수녀가 파견되어 전교사업과 유치원 및 성모성심학원 일을 맡아보기 시작하였다. 1937년을 전후하여 김명제 신부는 황해도 내에서 가장 웅대한 2층 벽돌 성당을 비롯하여 사제관(2층), 수녀원(4층) 등 일련의 건축공사를 완료하였으며, 그 무렵의 본당 총교세는 1,326명이었다. 1942년 5대 박우철(朴愚哲,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8.15광복 이듬해인 1946년 12월 서울교구장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의 명에 따라 27세의 전덕표(全德杓, 안드레아) 신부가 38선을 넘어 사리원 본당 보좌로 부임하였다. 그는 회갑이 넘은 박신부를 잘 보좌하면서 북괴 정치보위부의 감시하에서도 의연한 자세로 열심히 사목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사리원 시내가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는 혼란 속에서도 성직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다가 그해 10월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어 혹독한 전기고문을 당한 후 살해당함으로써 순교하였다.

사리원본당

그 후 유엔군의 1.4후퇴 때 신자들은 박우철 본당신부와 함께 남으로 피난함으로써 이 본당은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역대 주임신부는 1대 이기준(토마스, 1916-1923년), 2대 백남희(白南熙, 베드로, 1923-1933년), 3대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1933-1936년), 4대 김명제(베드로, 1936-1942년), 5대 박우철(바오로, 1942-1950년) 신부였다.

-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