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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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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본당

서흥본당 瑞興本堂

소재지는 황해도 서흥군 서흥면 예운리(黃海道 瑞興郡 瑞興面 曳雲里). 서흥지방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수안(遂安)출신의 김기호(金起浩, 요한)가 1856년 서울에 올라가 뵈르네(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에게 영세한 후 서흥땅 두꺼비골[蟾谷]에서 전교하면서부터였다. 서흥땅 향교골[鄕校谷] 출신인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1845-1866)은 김기호의 권면으로 상경하여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1795-1866)에게 교리를 배운 후 1863년 베르뇌 주교에게 성세성사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순교, 1968년 복자위(福者位), 1984년 성인품에까지 올랐다.

병인박해로부터 33년이 지난 1899년 서흥읍 영파리(暎波里)에 재령(載寧)본당 관할의 공소(公所)가 처음으로 개설되었고, 1900년부터 관할성당이 검수(劍水)본당으로 바뀌었다. 이 무렵 서흥군내에는 10여개 공소가 있었고 신자총수는 400명에 달하였다. 1913년 검수본당 신부로 부임한 이기준(李起俊, 토마스) 신부는 이 지방 특유의 토질병인 허파디스토마에 걸려 시달리게 되자 서울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본당 이전을 간청, 승낙을 받고 1915년 9월 서흥으로 본당을 옮겼으며, 따라서 검수본당은 폐지되었다. 창립 당시 서흥본당의 총신자수는 920명(서흥읍 114명, 17개 공소 806명)이었다. 그런데 이기준 신부는 서흥으로 옮겨온 지 1년도 안 되는 1916년 6월 이 본당을 폐지하고 사리원(沙里院)에 가서 본당을 신설하였다. 이리하여 서흥은 1937년까지 21년간 사리원본당의 공소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1937년 서흥공소는 2대 안학만(安學滿, 루가) 신부를 맞아 다시 본당으로 부활되었다. 안신부는 2년간 서흥에서 전교하고 1939년 장련(長連)본당 창설신부로 전임, 그 뒤를 이어 부임한 사제는 3대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신부였다. 임신부는 그 해 가을에 공소시절부터 사용해 오던 성당 개축공사에 착수, 내부공간을 늘리고 기와를 새로 올리고 조선식 창문을 유리창으로 모두 바꾸었다. 1942년 1월 임충신 신부가 재임 3년만에 곡산(谷山)본당 사제로 전임됨에 따라 서흥은 또다시 본당이 폐지되고 사리원 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