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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창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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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창본당

사창본당 社倉本堂

황해도 수안군 대오면 사창리(黃海道 遂安郡 大悟面 社倉里)에 위치한 본당. 수안지방의 가톨릭교 선각자는 수안군 남면 무송동(南面 茂松洞) 태생의 김기호(金起浩, 요한)였다. 그는 1856년 서울에 올라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서 영세한 후, 황해도·평안도 여러 지방을 다니며 전교하였다. 1884년부터 1895년까지 프와넬(Victor Poisnel, 朴道行), 쿠데르(Vincentius Couderc, 具), 로(Joannes Rault, 盧若望), 르장드르(Ludevicus Le Gendre, 崔昌根) 등 4명의 프랑스인 신부가 차례로 수안의 가마올[大金洞]과 덕골[德谷]에 체재, 황해·평안 양도의 주요 고을에 공소를 설치하고 내왕하면서 전교하였다. 이 선교사들이 수안을 활동 근거지로 삼은 것은 이곳이 산간의 분지(盆地)여서 은거하기가 적합하고, 평안도로 왕래하기 편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르 장드르 신부가 1895년 가을에 평양으로 옮긴 후, 1896년부터 수안지방은 같은 강원도의 신계(新鷄)·곡산(谷山) 지방과 함께 지리적으로 인접한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삼포리(江原道 伊川郡 樂壤面 三浦里)에 위치한 포내본당(浦內本堂) 부이수(Petrus Bouyssou, 孫以燮, 베드로) 신부의 관할이 되었다. 그런지 30년 만인 1925년 사창공소가 포내본당의 관할을 벗어나 본당으로 승격되고, 인천(仁川) 본당 보좌신부이던 박정렬(朴貞烈, 바오로) 신부가 초대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3년 후인 1928년 박 신부는 발전 가능성이 희박한 사창을 하직하고, 중석광산 개발로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곡산읍내로 본당을 옮겼으며, 따라서 사창은 이 곡산본당의 공소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11년 만인 1939년에 사창공소는 다시 본당으로 부활, 사창리 출신인 이보환(李普煥, 요셉) 신부가 2대 본당신부로 부임, 2년 후인 1941년 송화(松禾)로 전임되었다. 그해 3대 임종구(林鍾求, 바오로) 신부가 부임, 역시 2년간 전교하다가 1943년 강릉(江陵) 본당으로 전임, 이때부터 이 지방은 다시 곡산본당의 관할에 들어가, 사창본당은 공소시대를 맞게 되었다.

8.15광복 후 북한지역이 공산치하에 들어간 지 3년만인 1948년 9월 평남 안주(安州) 본당에서 사목하던 김충무(金忠武, 글레멘스)가 4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광복 후 표면상으로는 이렇다 할 큰 박해는 받지 않던 북한의 가톨릭 교회는, 1949년 원산교구(元山敎區)의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 주교 이하 성직자 전원이 공산당국에 체포되고, 관하의 교회들과 덕원(德源) 수도원이 점거되면서부터 큰 시련을 겪기 시작하였다. 1949년 여름, 김충무 신부는 수안읍 내무서에 연행되어, 얼마 전에 발생한 해주(海州) 본당 한윤승(韓允勝, 필립보) 신부의 이른바 반공음모사건에 연루 여부를 추궁받은 바 있었다. 일단 석방되어 사창으로 돌아왔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낀 김 신부는 밤중에 성당을 떠나 피신길에 나섰다. 그 이듬해에 6.25 전쟁이 벌어지고, 그 이후 이 교회의 사정은 헤아릴 길이 없다. 한편, 김충무 신부는 사창본당을 빠져나가던 이튿날 평양에 도착, 다음날에는 다시 황해도 황주(黃州)의 정방산(正方山)에 들어가 수개월 동안 은신하고 있다가, 다시 은신처를 평남 만성(萬城)으로 옮겼으며, 1951년 1.4후퇴 때 월남하였다.

-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