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북녘본당 소개 > 서울대교구(북녘지역) > 은율본당

은율본당

평신도 16   성직자 0   수도자 6  

은율본당 殷栗本堂

소재지는 황해도 은율군 은율면 남천리(黃海道 殷栗郡 殷栗面 南川里). 은율은 황해도 해안 10개 읍(邑)의 하나로 구월산(九月山)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장 최초의 천주교인은 황중백(黃仲伯)으로,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풍천옥(豊川獄)에서 순교한 후 1870년 경부터 박해 때 살아남은 글라라라고 하는 여자 교우가 전교한 결과 5명의 예비 신자가 생겼다. 은율에서 처음 미사가 봉헌된 것은 1881년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에 의해서였다. 리우빌 신부는 1880년 뮈텔(Mutel, 閔德孝, 후에 제8대 서울교구장) 신부와 함께 만주 요동(遼東)에서 뱃길로 장연(長淵)의 태탄(苔灘)으로 상륙, 극락(極樂)의 공소를 근거지로 삼고 은율, 풍천, 장연, 안악(安岳) 네 고을에 전교하였다. 1886년과 1887년에는 쿠데르(Couderc, 具) 신부와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은율지방에 전교하였다.

1887년 로(Rault, 盧若望) 신부가 황해도의 고정 선교사로 임명되어 장련(長連)에 도착, 은율에 처음으로 공소를 개설한 이래 은율공소는 본당으로 독립할 때까지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파이아스(Pailhasse, 河敬朝), 빌렘(Wilhelm, 洪錫九) 등 여러 프랑스인 선교사들에 의해 전교되었다. 1902년 은율 공소가 설정된 지 15년만에 장연 본당의 관할(1898년부터)을 벗어나 본당으로 독립, 초대 르 장드르 신부에 이어 2대 멜리장(Melizan, 梅履霜) 신부가 1905년 재령(載寧)본당으로 전임되었다. 이때부터 1914년까지 8년간 신부 배정이 안 되어 다시 장연본당 관할의 공소로 격하되어 있었다. 1914년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3대 주임 사제로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부활하면서 교세가 크게 신장 되었다.

은율본당

1920년 6월 본당 신부가 교체되어 4대 백남희(白南熙, 베드로) 베드로 신부가 부임, 1923년에 전임, 5대 이보환(李普煥, 요셉)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 신부와 교우들의 성금으로 성모(聖母)유치원이 개원되었다. 그 후 6대 이순성(李順城, 안드레아, 1928~1934년), 7대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1934~1935년) 신부가 재임한 후 8대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윤 신부는 은율 제일의 갑부요 한학자인 홍성숙(洪性肅, 베드로)을 영세 입교시켰으며, 1936년 윤성숙이 사망하자 그 아들 홍세뢰(洪世雷, 필립보)는 선친의 유언대로 교회사업에 많은 재산을 희사하였다. 윤 신부는 사목활동 외에 그 당시 최초의 군난소설(窘難小說)인 ≪은화≫(隱花)를 집필, 기해(己亥)박해 100주년 되던 1939년 1월부터 그가 납치되던 1950년 6월까지 <경향잡지>(京鄕雜誌)에 연재하여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1939년경의 본당 총교세는 1,200여명이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전날에 윤의병 신부는 정치보위부에 연행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후 많은 본당 교우들은 황해도내의 타군(他郡)의 청년들과 구월산(九月山)을 근거지로 반공 무력투쟁을 벌이다가 대한민국으로 월남하였다. 은율 출신으로 6.25 때 순교한 성직자로는 당시 사리원(沙里院)본당의 보좌로 있던 전덕표(全德杓, 안드레아) 신부가 있다.

-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