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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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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동본당

청계동본당淸溪洞本堂

1898년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리(黃海道 信川郡 斗羅面 淸溪理)에 창설되어 1912년 폐쇄된 서울교구 소속 본당. 청계동은 황해도의 유서깊은 교우촌의 하나로, 1863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의 황해도 순방 때 17가구의 천주교인이 살고 있었다. 베르뇌 주교는 매년 청계동을 방문하여 공소회장 박 프란치스코의 집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성당터까지 물색해 두었으나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로 인해 공소회장 박 프란치스코와 김 베드로, 김 시몬 부자(父子)가 순교하고 나머지 교우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교우촌은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896년 안태훈(安泰勳)에 의해 청계동에는 다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 해 12월 안악(安岳) 매화동(?花洞) 본당의 빌렘(Wehelm, 洪錫九) 신부가 2명의 전교회장을 파견, 1897년 1월 안태훈 일가를 비롯한 33명이 세례를 받았고, 이어 부활절에는 66명의 영세자가 나오게 되었다. 청계동에서 이처럼 활발한 개종운동이 일어나자 빌렘 신부는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고, 1898년 4월 자신이 직접 청계동으로 부임하여 청계동 본당을 창설하였다. 이렇게 해서 황해도 전교의 요충지로 창설된 청계동본당은 신천, 재령, 해주, 봉산, 송화, 문화 등의 지방을 관할하게 되었다. 1898년 사제관을 신축하고 성당이 증축되었으며, 1899년에는 재령본당을 분할, 독립시키고 재령과 봉산의 전지역과 신천의 일부지역을 재령본당에 이관하였다.

그 뒤 1900년에는 교우수 800여명, 예비자수 600여명, 공소수 25개소의 놀라운 교세신장을 기록, 뮈텔 주교의 특사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청계동을 방문하여 실태를 조사해 가기도 했는데 이렇게 놀라운 교세신장은 빌렘 신부와 안태훈 일가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빌렘 신부는 청계동에서부터 해주와 옹진반도 그리고 서해의 도서지방에까지 전교여행을 다녀 1902년에는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잠시 머물렀던 순위도(巡威島)에까지 공소를 개설하였고, 안중근(安重根)도 빌렘 신부를 보좌하며 황해도 각지를 전교하는 한편, 뮈텔 주교에게 인재양성을 위한 대학의 설립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해도에서의 천주교 세력을 막으려는 일부 지방관리들에 의해 1901년부터 1903년까지 소외 ‘해서교안’(海西敎案)이라는 교회와 정부와의 마찰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청계동본당은 다른 황해도의 본당들과 함께 교세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을 전후해 성인영세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게 되자 빌렘 신부는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인 해주로의 진출을 모색하여 결국 1912년 해주에 본당을 신설하고 청계동본당을 공소로 격하시켰다. 그 위 청계동은 계속 해주본당의 공소로 존속해 오다가 1949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으로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